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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한 바퀴 돌기-오데사 여행
작성자 : 관리자(admin@web2002.co.kr)  작성일 : 20.03.31   조회수 : 978

 

 

 

오데사 (Odessa)의 배경 설명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는 흑해의 북해 안에 있는 항구도시이며, 흑해 연안 최대의 무역항이다. 

흑해 북쪽의 오데사만에 면하며, 키예프, 모스크바를 잇는 항공로와,바투미(조지아), 이스탄불(터키)을 잇는 정기항로와 각 방면에 이르는 철도가 있다.

 

 

 

선박, 화학비료, 발전기, 공작기계, 냉동시설, 크레인, 영사기 등을 제작하는 중공업이 성하며, 제차(製茶), 직물, 제분, 식육가공, 수산물 가공 등의 경공업도 활발하다.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서 종합대학(1865), 상선학교 및 각막 이식수술로 유명한 필라토프 안과의학연구소 등의 연구기관이 있고 여러 개의 극장과 박물관이 있다. 

1792년 건설된 러시아의 요새가 시의 기원이며, 1794년 군항이 되고 1795년 부근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오데소스(Odèssós:34세기에 멸망)를 기념하여 명명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밀의 대량 수출항으로서 크게 번영하였으며, 남러시아 최대의 항구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시내의 도시계획이 진행되었으며, 구(舊) 시가지가 정비되고 프리몰스키 대로(부두와 시가를 잇는 유명한 ‘포템킨의 계단’도 그 일부)가 건설되었다. 

러시아 혁명운동의 중심지였으며, 1875년에는 '남러시아 노동자동맹’이 결성되고, 1905년에는 전함 ‘포템킨’의 수병 반란이 있었다. 

또 1941년 가을에는 독일군의 포위를 69일간 버팀으로써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다.  남쪽 해변은 휴양지로서 사철을 통하여 많은 관광, 휴양객들이 찾아든다.

 

 

오데사에는 러시아 혁명 중 대량 학살이 벌어졌던 역사적으로 유명한 포템킨 계단이 있다.

1905년, 흑해의 오데사 항구의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가 차르의 폭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최초의 러시아 혁명'이라 알려졌으며 1917년 혁명의 전조가 되었다.

해병들이 차르의 군대를 도와 반란자들을 진압할 수 있도록 전함 '포템킨 타브리체스키' 호가 오데사 항으로 돌진해 들어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해병들의 다수는 노동자들과 동조하여 명령에 항거했고 전함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군대와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봉기하도록 이끌었다. 

항명의 주동자는 뒤이어 일어난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당시 '리슐리외 계단'이라 불리던 곳 아래에 놓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유해에 경의를 표하며 지나갔고 차르의 군대가 진격해 와 약 2천 명의 사람들을 살상했다. 

1925년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자신의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 이 반란을 그려내 영화를 통해 이 계단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192개의 이 계단은 1837년에서 1841년에 걸쳐 프랑스 건축가 F. 보포에 의해 건설되었다. 계단은 착시를 일으키는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꼭대기에 서 있으면 계단이 전혀 보이지 않고 몇 개의 층계참만이 앞으로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래에 있으면 계단이 보이기는 하지만 정상에 가까이 다가 갈 때까지 꼭대기에 있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포템킨'이라는 이름은 예카테리나 대제의 연인이자 비밀 남편이었던 포템킨 공에게서 왔다. 그는 18세기에 흑해 안의 대부분을 정벌했으며 흑해 해군을 창설했다. 

이 계단은 전함에서의 반란 사건이 있은 후에야 '포템킨 계단'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리슐리외 계단'이라는 원래 이름은 오데사의 전 총독이었으며 계단의 건설을 명했던 리슐리외 공작으로부터 왔다. 

참조[네이버 지식백과].

 

 

여행

 

 

2020년 3월 9일,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고, 호텔 밖은 영하의 날씨로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호텔에서 간단한 조식을 먹고, 호텔 로비 아가씨의 상냥한 인사말을 뒤로하고, 차를 남쪽으로 향했다.

 

 

키예프에서부터의 거리는 약 450킬로미터, 서울-부산 거리이지만, 네비는 약 6시간을 예상하고 있었고, 그 이유는 오데사에 가까워지면서 알 수 있었다. 

키예프의 회색 풍경은, 시내를 벗어나면서 점점 나뭇잎들의 갈색이 봄을 알리기 시작하는 새싹들로 변하면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고, 

빽빽하게 들어찬 하얀 자작나무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여행의 설렘을 더하기에 충분하였다. 

 


 

점심시간이 되어가고 차에 주유도 할 겸, 간단한 스낵을 먹을 수 있는 WOC 란 표지판이 있는 휴게소로 들어갔다. 

우크라이나의 주유소는 한국과 같이 기름을 넣어주는 사람이 있다.  

먼저 어떤 기름을 얼마만큼 넣을지 말을 해 주고  건물 안에 들어가서 컨펌을 계산대에 하면 주유가 시작된다. 

 

 

 

기름은 다양한 종류가 있기 때문에, 렌트카 이면 미리 확실하게 알아 놓는게 좋다.

기름값은 서유럽에 비교하여 너무 싸다,  무연 1리터에 약 1달러 정도!

 

 

기름값을 지불하면서, 즉석 1달러 짜리 핫도그를 하나 주문했다, 우크라이나의 핫도그는 일단 소시지를 선택하고, 다음은 빵 종류,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소스를 넣을지를 알려 주면 된다.  우크라이나 전국 주유소에선 이런 종류의 핫도그를 모두 판다.

 

 

 

바삭한 빵과 잘 어울리는 소세지는 간단히 한끼를 때우기에는 제격이고 맛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편이였다.

화장실도 전담 청소하시는 분이 계셔서 그런지 매우 청결했다. 무료.

 

 

차를 4시간 정도 달리면 주변 풍경은 약간 달라지기 시작한다.  넓은 벌판들이 나오고 초록빛 밭이 더 많아지게 된다.  

아무래도 남쪽으로 달리니 봄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도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저기 구멍이 너무 많이 뚫려있어서 도저히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인데 이렇게 까지 도로유지보수 관리가 안되어 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속도로 이용 톨 비가 전혀 없는 것 한가지는 정말 좋았다.

 

 

오데사 시내로 들어서면 다른 도시들과 같이 매연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한다. 

발전이 덜 된 것인지 아님 역사적 보존 때문인지 어쨌든 시내 안의 건물들은 백년전보다 더 오래된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일찍 출발한 덕분에 어둡기 전에 호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호텔은 프랑스계 Hotel de Paris로 상당히 고급스러운 호텔이였다. 

직원들도 프로페셔널하게 손님들을 대하고 모든 서비스가 5성급 호텔임이 틀림없었다.  

뉴욕이나 서울이라면 하룻밤에 최소 3-4백 불은 지불해야 겠지만 숙박료는 단 100불 정도였다. 

호텔에서 포템킨 계단까지는 약 50미터여서 서둘러서 카메라를 둘러 메고 포템킨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앞에는 커다란 동상이 있었는데 예상했던대로 리슐리의 동상이었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첫인상은 약간 실망이었다, 계단은 영화에서 보았던 올드한 계단이 아니였다. 

최근에 새로 리노베이션을 한 듯해 보였고, 시원한 바다의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객선 터미널 같은 건물과 호텔이 앞을 막고 있어서 답답해 보였다. 

 

 

 

어지럽게 나열된 화물 크레인 들은 이곳이 휴양지가 아니라, 산업부두라는 것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 

 

 

일단은 계단의 위아래에서 건축가가 의도한 착시의 배열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고, City park을 지나 Colonnade of Vorontsov Palace까지 걸어갔다. 

여러 젊은이들이 셀카를 찍느라 정신들이 없어 보였다. 

 

 

 

걸음을 옮겨 시내의 중심 부분인 City Garden으로 들어섰다.  온화한 날씨 때문인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코로나 때문에 한창 어지러운 상황이였지만 이곳은 다른 행성인 듯 평화로워 보였다.

 

 

공원 안에는 분수도 있고 쉴 수 있는 벤치도 많이 있었다. 먼저 눈길에 들어온 것은 오데사의 예술가인 레오니드의 동상, 그의 옆에 앉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 배우, 가수, 지휘자로 활동했던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 반대 편에는 러시아의 소설 <열두 개의 의자>의 작가들에게 헌정하는 의자 동상으로 그곳에 앉아 볼 수도 있는데 의자에 앉으면 부자가 될 수 있는 행운이 온다는 믿거나 말거나....

 

 

공원을 지나 대로를 따라가니, 명동 같은 오데사의 중심가인 데리바시브스카 거리(Derybasivska)가 나왔다. 

거리에는 버스킹 등 공연이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거리 중앙까지 나와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기저기 조랑말들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부들은 주로 십대 소녀들이었으며 비지니스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셀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시내를 한 바퀴 돈 뒤,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바닷가 쪽 볼품 사나운 건물들 뒤에는 뭐가 있는지가 궁금했고, 혹시라도 멋진 석양이라도 담을 수 있는 행운을 기대하며,

항구를 향해 가는 도중에 무슨 의미인지 애매한 조각품 'Zolote Dytia'를 만났다. 

자궁 속에 있는 동자승 같기도 하고, 배경을 모르는 나에게는 참 생뚱맞은 조각품이었다.

 

 

오데사 부두의 끝부분에는 러시아 동방 정교회가 있고 양 옆으로 대형 크레인이 줄을 이어 있었다.

 

 

가운데는 루마니아와 터키행 페리와 유람선의 선착장이 있었다.

 

 

선착장을 둘러 나오는 길에, 오데사 화보에서 보았던 아기와 함께 바다에 간 남편을 기다리는 조각상 '선원의 아내(Sailor's Wife)'를 만났다. 

보통의 항구도시들에 빠지지않고 흔하게 있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나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상이나 망부석과는 조금 다른, 

남편이자 아빠가 저기에서 막 걸어오고 있는 것 같은, 즐거운 만남을 기대하는 것 같은 밝은 조각상이었다. 

 

 

사진사의 눈에는 바다의 석양을 배경으로 뒷모습이 작품이 될 것도 같았으나, 안타깝게도 해는 바다의 반대편으로 지고 있었고, 바다 위에는 달이 둥그렇게 떠 있었다. 

석양 대신에 일출을 찍으리라 마음먹고, 발걸음을 다시 시내로 옮겼다. 한참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일단은 낮에 보았던 시내의 노천 먹자골목으로 가보았다. 

비수기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고 군데군데 음식을 안주삼아 간단하게 요기를 하는 사람들만 보였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것 때문인지 스테이크와 맥주가 먹고 싶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술보다는 음식에 집중하는 식당에 들어가서 맥주와 립아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가격은 싸지도 않았는데 맛은 정말 최악이었다. 그냥 대충 길거리 음식으로 때울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호텔에서 제공한 화이트 샤르도네 와인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새벽 5시에 알람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해뜨기 전 거리의 풍경과, 어제 마음먹었던 일출을 찍기 위하여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어제의 따뜻함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였다. 찬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덕분에 텅빈 거리를 마음껏 촬영할 수 있었다.

 

 

일출 시간에 맞춰서 계단을 내려가 부둣가로 향하였다. 한참을 기다린 후 붉게 변하는 수평선과 함께 여인상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호텔을 체크아웃한 후에 근처에 조그만 카페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간단한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를 오더 했다.  

손님도 없는데 약 30분 정도를 기다린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 가격은 약 20불 정도로 생각보다 비쌌다.

 

 

정말로 가보고 싶었던 오데사,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마 내가 놓친 게 많고, 

단지 아름다운 것 만을 추구하는 나의 취향과 멀었던 이유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망한 오데사를 뒤로하고  미지의 서쪽 슬로바키아, 몰도바 국경지역으로 떠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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