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이우의 안느”, 유럽 왕족의 여주인공이 되기 위한 우크라이나 공주의 로맨틱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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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크라이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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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용 조랑말을 끄는 여학생 마부가 보기드문 미인이다

야로슬라비브 발(YAROSLAVIV VAL STR )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키이우 시내를 한가롭게 산책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키이우 역사의 상징적인 골든 게이트(Golden Gate)부터 그림 같은 르비브스카 공원(LVIVSKA PARK)까지 이어지는 이 코스는 드니프로강(Dnipro River)과 매력적인 포딜(Podil) 지역의 멋진 전망을 골고루 감상할 수 있는 즐거운 산책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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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구시가지에 위치한 야로슬라비브 발 거리

“키이우의 안느”동상 발견

이 거리를 따라 흥미로운 광경 중 하나는 어린 소녀의 작은 동상입니다. 언뜻 보면 다소 엄숙하고 종교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나는 이 작품이 생텍쥐페리의 사랑받는 캐릭터인 어린 왕자를 묘사하거나 아마도 스탈린 시대에 학살당한 우크라이나 어린이를 추모하는 동상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호기심에 더 가까이 다가서면서 프랑스어로 “ANNE de Kiev”라는 비문을 발견하면서 “키이우의 안느”를 기념하는 동상인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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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비브스카 공원

비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인 앙리 1세의 아내들

2016년 우크라이나 주재 프랑스 대사가 세운 “키이우의 안느” 동상은 1031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앙리 1세의 세 번째 프랑스 여왕으로서 그녀의 중요한 역할에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앙리 1세가 권력을 잡으면 정치적 혼란이 닥쳤는데, 그는 경쟁 세력의 저명한 인물인 그의 어머니 및 형제 로버트와 충돌했습니다.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 1세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특히 여성과 관련된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딸 마틸다와의 첫 번째 결혼은 결혼 3개월 만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비극적으로 끝났다. 이후의 결혼도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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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의 안느”동상

동맹의 과제인 유럽 왕실 번식과 교회의 근친상간 결혼 금지

당시 프랑스는 서방에서 강력한 왕국 중 하나였으며 그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졌지만, 대부분의 유럽 왕실은 그에게 혼인의 문을 닫았다.
교회가 그동안 만연했던 왕족 간의 근친혼을 바로잡기 위해 7촌까지의 결합을 절대 금지하였다. 이전에는 왕들이 근친혼의 비참한 결과를 무시하고 영토 확장을 위해 결혼을 했으며 때로는 자신 조카와 결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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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앙리 1세의 절박한 신부 찾기

직간접적으로 프랑스 군주와 동맹을 맺지 않은 나라는 없었기에 근친이 아닌 공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절망한 앙리 1세는 약혼자를 찾기 위해 사절단을 먼 동쪽으로 보냅니다. 그가 첫 좋은 소식을 받는 데는 무려 5년이 걸렸다.
바로 키이우 대공 야로슬라프의 딸인 안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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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슬라비브 발(YAROSLAVIV VAL STR )거리 입구

우크라이나 고귀한 혈통: 안느의 출신 배경과 교육

안느는 마케도니아 왕과 비잔틴 황제로 거슬러 올라가는 명문가 출신입니다. 그녀는 신중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구사했습니다. 그의 6명의 형제자매는 모두 성공적인 결혼을 했습니다.
한 명은 노르웨이의 여왕이고 다른 한 명은 헝가리의 여왕이며 그녀의 형제 중 한 명은 영국의 Harold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당시 종교의 차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로마 기독교와 정교회 기독교가 1054년까지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고 아직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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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딜 구역 전경

그녀의 어머니인 스웨덴의 잉그리드로부터 안느는 우아함, 재치, 금발 머리, 관능적인 입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안느의 미모가 멀리 콘스탄티노플까지 칭송된다는 말을 들은 앙리 1세는 갑자기 눈이 반짝입니다. 그는 당장 주교를 키이우에 보내서 안느 아버지에게 대신 청혼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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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서부 개방에 생각이 많았던 안느의 아버지는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Anne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프랑스를 향해 상당한 지참금을 실은 마차를 타고 위험하고 먼 길을 떠납니다.
마침내 소문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약혼자를 만난 앙리 1세는 즉시 그녀에게 반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여왕으로서 우크라이나 공주 안느의 삶

결혼 후 몇 년 동안 안느는 남편에게 미래의 필립 1세가 되는 필립을 포함하여 네 자녀를 낳아 주었습니다. 이전까지 필립(그리스 기원)이란 이름은 서유럽국가에서 사용되지 않았고, 처음이었습니다.

결혼 당시 앙리 1세는 43세, 안느는 25세로 큰 나이 차이가 있었고 결국 앙리 1세가 먼저 일찍 사망하자 안느는 필립 삼촌에게 필립 1세의 섭정을 맡기고 파리 근교 성으로 옮겨 가서 새로운 생활을 즐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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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과 스캔들: 안느와 라울의 관계와 그 결과

해방된 젊은 과부 안느는 매우 활기차고 인기 있는 파티와 피로연을 자주 개최하였으며 남성 초대객들은 아름다움이 빛나는 여왕과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눈먼 남자 중에는 당시 프랑스에서 강력한 영주 중 한 명인 라울이 있었습니다. 안느도 같이 사랑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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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라울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아내에게 친정에 다녀오라고 한 뒤 숲속에서 납치하여 가두어 버리고 실종신고를 하고 안느와 재혼합니다.

이 납치와 그에 따른 결혼은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교황 Alexander II는 라울에게 실종된 아내를 되찾도록 명령합니다. 라울은 교황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교황은 라울의 재혼을 무효로 선언합니다.

그러나 라울과 안느의 줄기찬 사랑에 교황도 국민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굴복하게 됩니다. 필립 1세도 어머니를 용서하면서 이들은 공식적인 부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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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활동과 헌신: 안느의 말년

1074년 라울이 세상을 떠나자 안느는 말년을 수도원 건축과 복원에 바쳤습니다. 혹 파리를 여행하실 때에 항공기가 파리 샤르를 드골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서 천천히 내려갈 때 아래 보이는 그림 같이 말끔하게 단장된 수도원 건물들이 모두 그녀가 복원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 그녀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1079년에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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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게이트 주변


우크라이나 출신 안느 여왕이 유럽 왕족에게 미친 영향

프랑스의 왕뿐만 아니라 영국, 벨기에, 스페인, 스웨덴 군주도 모두 유럽의 첫 번째 할머니로 간주할 수 있는 안느 여왕의 후손입니다. 우리가 프랑스에 시집온 우크라이나 공주 역사까지 알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종전되고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 멤버가 되었을 때, 그때는 유럽연합의 역사로 중요시될 수 있기에 알아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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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잠시 잊는 우크라이나 청소년


사진 출처: 우크라이나2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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